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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로뎀 2002

엄마의 비가(이태원의 푸른밤)

최고관리자 0 2376

익스큐스 미, 마이 하우스, 프리걸,

 

60년대 후반의 이태원과 삼각지, 한남동 일대에서는 어떻게 어설픈 영어가 한국여자들의 입에서 참 슬프게도 흘러나왔다. 한국인이지만 미국인을 닮으려 애쓰는 여자들, 돈 많은 미국인을 유혹하려 하얀 속살을 드러내 놓고 거리 곳곳으로 숨어 다니는 여자들, 나는 그들 속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지섭이 죽은 후, 나의 우울증은 더욱 심각해져 갔다. 스물 한 살, 막 성인식을 끝낸 나에게 다가오는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장래가 촉망되던 한 남자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새파란 젊은 남자를 잡아먹었다고 손가락질 까지 당했다. 내 안에서도 지섭을 죽였다는 자책의 목소리가 끝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넌, 지섭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어. 그를 단념해야 했어, 네가 괴로우니까 그렇게 못했던 거야, 넌 나쁜 년이야,’ 누군가 내 귓속을 쩌렁쩌렁 우리듯 목소리를 높인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리는 환청에 괴로웠다. 거리의 사람들까지 나를 향해 ‘살인자’ 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 그래서 여기를 떠나자.’

 

조국을 떠날 결심도 그때 처음이었다. 미국을 가면 수술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의사의 말이 그런 결심을 더욱 굳게 했다. 떠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고 싶었다. 그리고 되도록 짧은 시간에 큰 돈을 만질 수 있는 곳을 찾아야 만 했다. 

 

나는 몇 가지 옷만 챙겨 가방에 넣은 후, 편지 한 장을 써 놓고 언니 집을 나왔다. 언니에게 미안했지만 더 이상 언니에게 기댈 수 는 없었다. 나도 이제 성인인데 내 갈길을 찾아야 했다. 언니에게는 언니의 삶이 있으니 나에게도 언니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나의 삶이 있는 것이다. 먼저 미국 사람이 많다는 삼각지를 찾았다. 미군 부대를 지나 콜터 동상 앞까지 갔다. 구두 닦는 소년에게 영어 배우면서 밥도 먹여 줄 만한 곳이 없느냐고 물었다. 소년은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무슨 일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돈을 벌어서 미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소년은 나를 따르라는 것이다. 그의 호의가 다소 의심스러웠지만 어린 녀석이라 믿기로 했다. 이태원 골목은 미로와도 같았다. 골목을 지나면 또 다른 골목이 나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판에 ‘평양집’ 이라고 쓰여 있는 낡은 한옥집 앞에 이르자, 소년은 자주 드나드는 친지의 집처럼 자연스럽게 대문을 열었다. 밖은 초라했지만 안체로 들어와니 제법 큰 규모다. 그곳에는 여자들이 참으로 많았다. 머리에 물을 들이고 핏기 없는 얼굴에 헐렁한 옷을 아무렇게나 걸친 여자들, 물어 보지 않아도 이곳이 어떤 곳임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눈빛에서 ‘또 하나 들어오는군...’ 하는 소리를 읽을 수 있었다. 마치 이방인을 구경하듯 무심하고도 경멸에 찬 눈초리들, 나는 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도망 치고만 싶었다. 아무래도 발을 잘못 들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소년은 주인인 듯한 여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주인 여자가 불렀다. 그녀의 방은 의외로 화려했다. 한쪽 구석에는 큰 침대가, 그 반대쪽에는 화장대와 전축, 장롱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마다 커튼으로 가져져 있어서 방밖에서는 안의 풍경을 잘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몇 살이니?”

“스물 한 살,,,”

“그래, 돈을 벌고 싶단 말이지, 돈은 많이 벌 수 있어, 하지만 각오는 해야 될 거야, 그래도 괜찮아?”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어요.”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다. 당시,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 마음 한 쪽에는 과연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이 있을까 하는 조바심이 들었다. 주인이 내 몸의 비밀을 안다면 분명히 내쫓을 것이다. ‘이젠 어떻하지...’ 큰 돈을 벌려면 이런 곳에서 일을 해야 하고, 또 이곳에서 일을 하려면 여자 구실을 못하는 몸으로는 살 수 없지 않은가, 갈등에 사로잡힌 나에게 주인 여자가 가까이 다가 앉으면서 묻는다.

 

“이봐 남자는 좀 상대해 봤어?”

“처음이에요...”

 

주인 여자는 믿어지지 않는 눈치다. 남자를 모르는 여자가 제 발로 이런 곳을 찾는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웃기는 소리 마, 경험도 없는 년이 어떻게 제 발로 여길 찾아와 이 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해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과 미국에 가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간절한 심정이었다. 이제 내가 매달릴 곳은 여기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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